코코순이


코코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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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시보기코코순이
KOKO SunYi , 2022
다큐멘터리 한국 125분
2022 .08.25 개봉 [국내] 전체 관람가
감독 : 이석재

왜곡된 기록 감춰진 진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 이름 ‘코코순이’
1942년 5월, 조선군사령부의 제안으로 일명 파파상, 마마상 부부가 전국을 돌며 취업을 빌미로 부상 병사들을 돌볼 여성을 모집해 부산, 대만, 싱가포르를 거쳐 미얀마에 위치한 일본군‘위안부’ 수용소로 보낸다. 1944년 8월, 연합군과 중국군에 밀린 일본군과 붙잡힌 조선인 여성들은 연합국의 포로가 되어 통역도 없이 일어와 영어로 심문 받은 후 인도 각지로 흩어진다. 그리고 발견된 이들 조선인’위안부’ 20명에 대해 기록한 미 전시정보국 49번 심문보고서에는 “조선인’위안부’는 돈 벌이에 나선 매춘부”라는 것. 20명 중 행적을 알 수 있는 단 한 명, ‘코코순이’라는 이름의 단서를 추적해 왜곡된 기록 속에 감춰진 진실을 밝힌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저들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About Movie

OWI 49번 심문보고서 거짓 실체
전 세계 최초 공개

영화 ‘코코순이’는 강제 동원된 ‘위안부’ 피해자 중 미얀마에서 발견된 조선인 포로 20명을 심문한 보고서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왜곡된 기록과 감춰진 진실을 밝히는 추적 르포무비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매도하는 일본 우익단체와 관련인들의 근거가 되고 있는 미 전시정보국 49번 심문보고서의 거짓 실체를 전 세계 최초로 밝힌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미 전시정보국(OWI, Office of War Information) 49번 심문보고서는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전팀이 정리한 비밀문서로 현재 미얀마로 불리는 버마 북부의 미치나(Myitkyina)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심문 내용이 담겨있다. 20명이나 되는 ‘위안부’가 한 번에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까지 남긴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OWI 49번 심문보고서는 ‘위안부’들의 삶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일본 정부가 책임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었다.

영화는 1944년 연합군에게 붙잡힌 포로 중, 조선인’위안부’들의 심문 내용이 담긴 OWI 49번 심문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 부록에 기록되어 있는 행적을 알 수 있는 단 한 명, 코코순이라는 이름을 쫓는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름조차 제대로 받아쓰지 못할 정도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된 OWI 49번 심문보고서. 전 연합군 포로심문관인 생존자 아쿠네 겐지로의 인터뷰로 통역도 없이 작성됐음을 확인하고, 그 내용이 얼마나 노골적인 편견과 주관적인 평가로 가득한지 밝혀낸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왜곡된 역사를 전파하는데 ‘어떻게’, ‘왜’ 사용되고 있는지 영화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About Movie

완성도 높은 르포무비
세계 로케이션과 실력파 제작진

영화 ‘코코순이’는 다양한 사회 문제와 진실을 심도 깊게 파헤쳐온 KBS 탐사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의 촬영팀과 제작팀이 참여하고 이석재 기자가 연출을 맡아 완성도 높은 르포무비를 탄생시켰다. 취재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규정해 전 세계의 공분을 일으킨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 존 마크 램지어 교수를 추적해 영화에 최초로 등장시킨다.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을 훼손하고 모욕한 친일파 미국인 유튜버 텍사스 대디 토니 모라노의 행태 또한 고발한다.
코코순이라 불린 ‘박순이’ 할머니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함양과 제주도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활했던 미얀마와 파키스탄, 미국, 호주를 거쳐 세계 각지의 자료들을 찾아 직접 발굴했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소 현장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등 다큐 영화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큰 규모의 스케일을 선보인다.

‘코코순이’의 엔딩 음악에 가수 이효리가 작사, 작곡, 노래한 ‘날 잊지 말아요’가 삽입된다. 201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프로젝트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두 번째 노래들] 수록곡으로 이효리의 따뜻한 목소리와 시적인 가사가 긴 여운을 선사한다.
‘겨울왕국’의 안나와 ‘유미의 세포들’의 감성세포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들로 인정 받은 박지윤 성우가 내레이션으로 합류해 신뢰를 더한다. ‘나의 해방일지’와 ‘스카이캐슬’, ‘머니게임’ 등의 OST에 참여한 박정은 음악감독, ‘별에서 온 그대’, ’펜트하우스’ 등에 참여한 하랑스튜디오가 VFX를, ‘시사기획 창’, ‘PD수첩’, ‘생로병사의 비밀’의 솔미디어컴퍼니가 Visual Effect를 담당해 완성도를 높였다.


About Movie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 통과 15주년
기림의 날 제10회차
2022년 개봉이 더욱 특별한 이유

2022년 올해는 미 하원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통과 15주년과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기림의 날)’ 공식 제정 10회차가 되는 해이기도 해, 영화 ‘코코순이’ 개봉의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

올해 통과 15주년을 맞은 HR121은 국제사회 일본 위안부 강제 동원 최초로 공식 인정한 사건으로 1997년 미하원 의원들이 의회에 제출한 이후 10년 만에 이룬 결과다. 2007년 7월 30일 미 연방 하원에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에 이를 공식적으로 시안하고 사죄와 역사적 책임을 요구하는 HR121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이 결의안 통과를 토대로 만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림의 날은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와 수많은 피해자의 용기 있는 행동을 기억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이루기 한 날을 기념해 제정된 날이다. 지난 2012년 대만에서 진행된 ‘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처음 정해 올해까지 이어졌다.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위안부’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는 240명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외면한 사이 현재 대한민국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11명에 불과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기 위한 진실 추적 르포무비 ‘코코순이’가 다시 한 번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꺼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Production Note

수많은 ‘코코순이’들을 찾는 여정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한 노력

영화 ‘코코순이’는 조선인’위안부’ 20명이 미얀마 미치나에서 발견된 뒤 귀국 송환할 때까지의 과정을 통해 역사에서,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진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전쟁이 끝나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독은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동원돼 먼 이국 땅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들의 운명을 조명하기로 했다.

1944년 8월 일본의 강제 동원으로 미얀마 미치나에 끌려간 조선인’위안부’ 20명은 연합군에 체포돼 조사를 받은 뒤 이후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소 현장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조선인’위안부’ 20명의 귀국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미얀마 미치나와 인도 레도 등에서 현장 답사와 증언 확보 등을 통해 귀국 행적 파악에 들어갔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 등을 찾아 미공개 자료 발굴을 통해 이름과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실제 강제 동원됐을 할머니 한 명의 존재도 확인했다.

영화에서 기타무라(Kitamura, 北村) 부부라는 조선인‘위안부’ 업주의 대대적인 취업 사기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1942년 5월 초, 마마상, 파파상으로 불린 부부는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위안 서비스(comfort service)”를 위해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했다. 업무는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로 둘러댔고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사기로 설득했다. 무엇보다 가족의 빚을 청산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강조했다. 선불금을 다 갚으면 돌아갈 수 있기는 하지만 전쟁상황에서 실제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1943년 6월 일본군 15군 사령부가 귀향을 허락해 조건이 충족된 ‘위안부’ 한 명이 돌아가고자 했으나 남으라는 설득에 쉽게 굴복했다는 것이다.

거짓에 속아 ‘위안부’로 강제 동원돼 이역만리 먼 타국 땅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눈물과 회환은 지워지지도 않고 치유도 되지 못한 채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과거만의 아픔이 아니라, 현재의 아픔이다.

어떤 기록이라도 남겨놓아야 이 분들의 아픔이 우리에게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강제 동원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미 전시정보국 49번 보고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이 투영된 보고서
미 전시정보국 49번 보고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이 투영된 보고서 | 결 KYEOL

글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의 특이성
이 보고서는 미 전시정보국(OWI, Office of War Information) 심리전 팀이 생산한 심문보고서로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의 제120호 조사보고서와 함께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보고서는 버마(현재 미얀마) 북부의 미치나(Myitkyina)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위안부’ 20명의 심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명이나 되는 ‘위안부’가 한 번에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까지 남긴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연합군 측에서도 최일선 전장에서 정체불명의 젊은 여성 20명이 포로로 잡힌 상황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따라서 전담 심문관을 배치하여 20여 일에 걸쳐 자세한 심문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이 문서가 유명해진 이유는 문서 자체의 희귀성과 특이함에만 있지 않다. 이 문서는 ‘위안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해 주관성이 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위안부’들에 대해 ‘일본인과 백인의 관점에서 예쁘지 않다’고 한다거나 ‘유치하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등 지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또한, ‘위안부’들의 삶이 비교적 풍족했고 버마 다른 지역에 비해 사치스러울 정도(near-luxury)였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적대적인 세력과 개인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여겨졌고, 일본의 극우세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자료를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 문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내용만 피상적으로 검토해서는 이 문서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문서를 생산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생산자, 즉 조선인‘위안부’ 20명을 심문한 인물의 특성 등을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는 다른 여타 심문보고서와 달리 문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과 느낌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다. 다른 보고서들은 건조한 문투로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이 문서는 굳이 심문자의 느낌이나 견해가 곳곳에 들어가 있어 상당히 특이한 사례이다. 그렇기에 논란이 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토 등을 통한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이 문서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뒤틀리게 이해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맞서 이 문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를 통해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49번 보고서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이유
이 문서는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조선인‘위안부’ 20명이 포로가 된 것을 계기로 생산됐다. 1944년 8월 10일 미치나 인근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은 미치나 비행장에 임시로 수용되었다가 8월 15일에 인도 레도(Ledo) 기지로 이송되었다. 본격적 포로 심문은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20여 일 간 진행되었다. 그런데 보고서가 완성된 날짜는 10월 1일이었다. 이는 심문이 끝난 다음에도 20일가량 추가적인 조사나 심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40일 정도가 전체 조사 기간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긴 심문과 조사 기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심문관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부대원들이 매우 바쁜 와중에도 ‘위안부’ 심문 담당자는 20명의 여성만을 전담하고 있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한다. 즉 당시 레도 기지의 미군 심리전 팀은 ‘위안부’ 심문과 조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게 해준다.
49번 보고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문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문서는 조선인‘위안부’ 20명의 발언과 증언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형식이 아니라 문서 작성자가 20명의 심문기록을 종합해 별도의 보고서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심문보고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명의 포로를 집중적으로 심문하여 기록한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 사람의 심문기록을 종합하여 보고서가 작성되기도 한다. 어쨌든 포로들의 발언과 증언이 그대로 보고서에 실리는 경우는 드물다. 필요에 따라 직접 인용되는 문구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고서는 심문관이나 문서 작성자의 분석과 판단을 거쳐 작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다.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2차대전 시기 미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이주민들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 루스벨트 정권은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계 이주민을 강제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동부의 독일과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는 이주 기간도 오래되었고 동일한 코카시안 계열이라 분리해내기도 쉽지 않아 수용정책은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서부지역 일본인 이주민은 대대적으로 강제 수용되었고 그 피해가 상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칭 니세이(Nisei)로 불리는 일본 이주민 2세들이 미군에 대규모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가족들이 강제수용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시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 곧 군인이 되어 참전하는 것이었다. 유럽 전선에는 니세이만으로 구성된 전투부대가 참전하여 상당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독립적인 전투부대 편성은 없었다. 대신 니세이들은 심리전, 포로심문 등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알렉스 요리치는 이러한 니세이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심리상태는 매우 복잡했다. 자신의 모국과 현 거주국 사이의 전쟁으로 가족들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고 자신들은 모국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심문관들의 정체성을 일차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국 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 사이의 식민-피식민 관계에 대한 인식이나 입장은 분명치 않다. 코카시안과 일본인의 입장에서 ‘위안부’들을 평가하는 것을 보건대, 요리치가 자신을 일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도 분명해 보인다.
요컨대 요리치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요리치가 조선인‘위안부’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규정했을 것이다. 그 시선이 ‘위안부’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음은 보고서 내용이 잘 보여준다. 요리치의 태도는 레도 기지 심리전 팀의 또 다른 아시아계 요원이었던 원 로이 챈(Won Loy Chan)과도 대비된다. 챈은 중국계 미군 대위로 스탠포드 대학을 나온 엘리트 장교였다. 그가 쓴『Burma: The Untold Story』에는 자신이 만났던 미치나의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잘 드러나 있다.
원 로이 챈과 니세이들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원 로이 챈은 장교였고 니세이들은 대부분 사병이었다. 요리치는 나중에 장교가 되어 소령으로 전역하였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사병이었다. 이러한 계급 차이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라는 모국의 차이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군 속의 중국계와 일본계의 차이가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49번 보고서의 내용을 이해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보고서가 조선인‘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제였다. 즉 요리치는 일본어와 영어는 가능했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고 ‘위안부’들은 일본어에 서툴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19세에서 31세 사이의 조선인‘위안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지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의 한국 이름이 영어로 채록되어 있는데,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위안부’들의 일본어가 유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심문은 마마상, 파파상으로 불렸던 위안소 업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타무라(Kitamura, 北村) 부부가 조선인‘위안부’들의 업주였는데, 이들이 통역 겸 대변인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위안소 업주가 ‘위안부’들을 대변했다면 그 내용이 업주에게 유리한 것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심문관과 심문 과정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에 대한 주관적 편견이 가득한 보고서
49번 보고서는 서문, 모집(recruiting), 성격(Personality), 생활 및 노동조건, 요금체계, 이용 일정, 보수와 생활 조건, 일본군에 대한 반응, 군인의 반응, 군사 상황에 관한 대응, 후퇴와 포획, 선전, 요청 등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위안부’ 20명의 한국 성명 명단과 위안소 업주 부부의 이름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본문 6쪽과 부록 1쪽을 합쳐 총 7쪽 분량이다.

보고서 서문에서는 ‘위안부’를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배속된 창기(prostitute)라고 단정했다. 모집 부분에서는 1942년 5월 초, 일본인 업자들이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위안 서비스"(comfort service)를 위해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음을 설명했다. 업자들이 사용한 방식은 일종의 사기술에 가까웠다. 즉 업무는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로 둘러댔고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가족의 빚을 청산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여성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무학이라고 했으며 몇몇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전체 규모는 대략 800여명 정도였고 8월 20일 즈음에 랭군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나뉘어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중 네 그룹이 미치나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가 그것이었다.
일부 편견과 주관적 평가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 자료는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들의 삶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위안소 운영 시간과 요금체계는 물론이고 ‘위안부’들의 수입에 대한 구체적 정보도 있다. 물론 ‘위안부’들의 수입은 업자와 분할해야 했고 자신들의 몫은 50~60% 정도였다. 위안소를 이용하는 일본군들의 반응도 나타난다. 일본군 중에는 줄 서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것에 수치감을 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작성자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의 편견과 문제점은 다음에 소개할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회보 제2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미치나의 조선인‘위안부’ 20명의 사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기에 다양한 문서들에서 다루어졌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와 달리 SEATIC 심문회보 2호는 사실관계 중심으로 건조하게 서술되었다.
어쨌든 요리치 보고서는 조선인‘위안부’가 “무학이며, 유치하고 이기적”임을 강조했는가 하면 “자기중심적”이며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고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심문관 요리치의 편견과 주관적 평가가 두드러진 대목이다. 편견은 ‘생활 및 노동조건’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요리치는 미치나의 조선인‘위안부’들이 다른 곳에 비해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고 했다. 특히 2년째 생활이 그러했다고 강조했다. 물건을 구매할 충분한 돈이 있었고 위문대를 받은 병사들로부터 선물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이 체육대회나 각종 소풍, 오락, 사교 행사 등에 참가하여 즐겼다는 기록도 남겼다.
이러한 진술이 ‘위안부’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위안소 업자들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요리치가 보기에 ‘위안부’들의 삶이 빈곤과 물자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수준은 아니었음을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파악이다. 일본군의 버마 점령 초기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미치나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지역의 모든 물자와 설비를 매우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학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위안소로 사용된 학교는 애초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던 미션 스쿨이었으며 심지어 목사 사택까지 위안소로 사용하였다. 미션 스쿨을 징발해 위안소로 이용할 정도로 일본군의 위세는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들에게 일정한 물질적 재화를 보장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었고 1944년 중반부터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위안부’들의 삶과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후퇴하면서 ‘위안부’들은 3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군을 따라갈 것을 명령 받았으며 그 와중에 전투에 휘말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고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도 ‘위안부’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특히 ‘위안부’들은 포로가 된 이후 자신들이 생포된 사실을 일본군에 알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다른 부대의 ‘위안부’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항복과 생포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따라서 전투원이 아닌 ‘위안부’들조차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매우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위안부’들이 일정 기간 물질적으로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거나 일본군의 각종 모임에 참여했다는 점 등은 사실 지엽적인 문제들이다. 주인의 재산인 노예들도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되었다. 즉 더 큰 이익과 욕망을 위해 노예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주인에게는 바람직했다.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위안소와 ‘위안부’들 역시 일본군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급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위안부’들이 항상적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소 제도의 비인간성과 ‘위안부’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위안부' 49번 심문보고서, 충격적인 실체 [김종성의 '히, 스토리']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850008&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김종성의 히,스토리] 한일 극우세력에 이용된 보고서, 내용 들여다 보니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파헤치는 르포영화 ‘코코순이’가 8월 25일 개봉된다. 미국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의 심문 보고서를 소재로 하는 영화다.
흔히 ‘전시정보국 49번 심문 보고서’로 불리는 이 문건은 ‘일본인 전쟁포로 심문 49번 보고서(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라는 제목으로 작성됐다. 작성자인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는 1944년 8월 10일 버마(미얀마)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을 심문한 뒤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의 원본은 서울시 서울기록원(https://archives.seoul.go.kr/item/82)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10월 1일 자로 제출된 이 보고서 7쪽 말미에, 심문 대상자인 피해자 20명과 위안소 업자 2명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이 중에서 14번째 위안부로 거명된 인물이 코코순이(Koko Sunyi)라는 여성이다. 1944년에 21세였던 이 피해자가 이번에 개봉될 영화의 주인공이다. 코코순이에 대한 추적을 통해 위안부 강제동원의 실상을 밝히는 방식으로 영화가 전개된다고 보도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 부정
그런데 지금까지 이 보고서는 위안부 피해를 인정하는 쪽이 아니라 부정하는 쪽에 의해 주로 활용됐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주장은 거짓이고 사기다’라고 주장하는 한·일 양국의 극우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사용해왔다. 그런 자료가 이번 르포영화에서 활용되는 것이다.
심문관인 알렉스 요리치는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의 관점으로 위안부들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면, 마크 램지어가 알렉스 요리치의 관점을 차용했다. 보고서 서두에서 알렉스 요리치는 “위안부(comfort girl)는 병사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군에 딸린 매춘부 혹은 직업적인 군속(professional camp follower)에 불과하다”라고 규정했다.
그는 일본군이 싸우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위안부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이들이 ‘럭셔리’한 대우를 누렸다고 서술했다. “이들은 다른 곳과 비교하면 버마에서 거의 호화로운(near-luxury) 생활을 했다”라고 말한다.
그는 여성들이 옷·신발·담배·화장품 등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었고, 병사들이 받은 위문품을 선물로 받기도 했으며, 군인들과 함께 외출도 하고 쇼핑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이런 내용은 위안부가 성노예였음을 부정하는 핵심 논거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위안부들이 받은 것은 군표(점령지에서 군용물품 구입 등에 사용된 긴급 통화)였고 그것은 휴지조각이 됐다. 그리고 사적인 시간을 누리기도 했다는 사실이 그들이 성노예였음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고대의 노예나 노비들도 근무시간 외에는 사적인 시간을 향유했다. 이런 이치를 무시한 채 한·일 양국의 극우세력들이 49번 보고서 같은 것을 활용해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없는 내용
그런데 이 보고서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살펴보면, 문서의 신빙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립적 관점으로 한국인 피해자들의 실상을 기록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인물이 심문을 담당하고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기관의 책임하에 작성된 보고서이기는 하지만, 보고서를 만든 알렉스 요리치는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에서는 일본계 주민에 대한 강제수용을 피하고자 미군에 자원 입대하는 일본계 2세가 많았다. 요리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신빙성을 평가할 때는 요리치의 처지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적대국인 일본의 혈통을 가진 재미 일본인의 마인드와 한국인을 식민지 주민으로 하대하는 제국주의 일본인의 마인드가 보고서에 투영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가능성은 가능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보고서에 반영됐다. 요리치가 심문 내용을 공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은 보고서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는 “심문은 평균적인 조선인 위안부들이 약 25세이며, 배우지 못했고 유치하고 엉뚱하며 이기적임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심문의 결과로 그런 결론이 도출됐다는 것이다. 유치하고 이기적이라는 평가는 그가 과연 객관적으로 여성들을 바라봤는지를 의심케 한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민간인 여성들을 보고 연민이 아닌 경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인지상정에서 벗어난다.
전쟁통에 미얀마까지 끌려간 여성들이 생존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되기 쉽다. 1944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3주간이나 집중적으로 심문을 진행한 사람이 그 정도 이해력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요리치가 보고서를 제출한 것은 10월 1일이다. 심문 종료와 보고서 제출 사이에 3주간의 간격이 있었다. 그사이에 판단을 가다듬거나 감정을 배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안부들에 대해 공정한 시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가 공정한 심문관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은 “그녀들은 일본인이나 백인 어느 기준으로 봐도 예쁘지 않다”라는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인격을 의심케 할 만한 이런 서술은 요리치 본인의 문제점보다도 그에게 그런 일을 맡긴 상관의 안목을 의심케 한다.
더 황당한 대목도 있다. “낯선 사람 앞에서 그녀들의 태도는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그녀들은 여성의 간계(wile)를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다. wile은 엉큼함이나 속임수로도 번역된다. 위안부 여성들이 겉으로는 양순하지만 실제로는 엉큼하고 간계를 부린다고 서술한 것이다. 굳이 쓸 필요도 없는 이런 내용을 그는 보고서에 담았다. 그가 위안부 문제의 공정한 사관(史官)이 될 수 없음은 이런 서술만으로도 잘 드러난다.
공정한 심문관의 자질을 결여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론에도 당연히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안부들이 돈도 많고 대우도 융숭하게 받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이 위안부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은연중에 사실 실토
보고서 7쪽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면, 위안부와 심문관 사이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영화 제목으로 등장한 코코순이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요리치가 상대방의 성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15번 연무지(Yon Muji), 16번 오푸니(Opu Ni), 19번 오키송(Oki Song), 20번 김겁투고(Kim Guptogo) 등의 인명이 그러하다.
심문관이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포로의 이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20명 중에 한두 명이라도 일어를 잘했다면, 그 한둘이 나머지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정확히 전달해줬을 것이다. 요리치 본인도 그 한둘을 통역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발음이 불분명한 인명들이 보고서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미국 상관들이 한국인 인명에 서툴지 않았다면, 그는 보고서를 다시 써야 했을 수도 있다.
포로들과의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도, 요리치는 위안부들에 대해 7쪽이나 되는 보고서를 생산했다. 이는 그가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보고서 말미에 적혀 있다.
위안부들의 인적 사항을 적은 7쪽 끝부분에, 함께 붙들린 일본인 위안소 업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38세 된 기타무라 도미코, 41세 된 기타무라 에이분이 그들이다. 성도 같고 주소도 같은 이 두 사람이 모리치의 진짜 심문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안부들이 돈이 많고 대우도 잘 받았다는 진술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매주 수요시위 현장에 나타나 ‘위안부는 사기다’라고 주장하는 한국인들과 바다 건너 일본에서 이들을 응원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핵심 논거 중 일부는 요리치의 보고서에서 나왔다. 이 점은 한·일 양국에서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는 일본 정부와 극우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베를린 같은 데에 소녀상이 세워지는 이유도 알려준다.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세력이 그처럼 허술한 자료들에 의존하고 있으니, 그들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위안부들에게 불리한 서술을 하는 와중에도 요리치가 이 문제의 실상을 보고서 곳곳에 흘렸다는 점이다. 그의 보고서에서는 피해 여성들이 스스로 위안부를 자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은연중에 튀어나오곤 한다.
요리치는 업자들이 여성들을 동원할 때 ‘위안부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부상병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설명한다. 싱가포르에서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말도 했었다고 알려준다. 그는 여성들이 이런 말에 속아 버마로 오게 됐노라고 말한다. 오늘날 위안부 문제의 쟁점 중 하나인 '자발적 참여 여부'에 관해 요리치가 적절한 증언을 해준 것이다.
이 대목은 요리치가 피해 여성들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폄하한 배경 중 하나를 시사한다. 거짓말에 속아 버마까지 가게 된 여성들이 그의 눈에는 불쌍하게 보이기보다 한심하게 보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요리치는 위안부들이 일본군의 통제를 받은 사실도 노출했다.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이들이 있었으며 일본군의 규정이 이들에게도 적용됐다고 설명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 등이 극구 부인했던 '일본군의 관여' 사실을 요리치가 실토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49번 보고서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쪽이 아니라 긍정하는 쪽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는 자료다. 신뢰성 낮은 요리치의 태도는 이 자료에 근거한 극우 세력의 주장을 배척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보고서 중간중간에 나오는 사기·기망에 의한 강제연행과 일본군 개입의 실상은 일본의 국가범죄를 입증하는 데도 유용하다. 르포영화 ‘코코순이’가 일본 극우세력의 무기인 이 보고서를 소재로 진실 규명에 나서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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